나비건설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시장을 찾았다. 재래시장은 우리네 정서가 듬뿍 담긴 모습들을 볼 수 있고 아주머니들이 조금이라도 깎아 보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에서 진한 삶의 내음이 느껴지기 때문에 난 가끔씩 그 곳을 찾곤 한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평소와는 다르게 가족과 함께 시장 구경을 나온사람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아내는 "자기야~"하더니 쑥쓰러운 생각이 들었는지 "호민이 아빠" 하며 좌판을 가리켰다. 둘이 있을 때에는 어떤 표현을 해도 거리낌이 없더니 여러 사람 앞이라 그런지 눈치를 보며 부르는 모습이 마치 수줍어 하는 소녀같았다.

아내가 발견한 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즐겨 먹던 도토리묵이었다. 나는 아내의 생각을 뻔히 알면서도 "왜 그래?" 하며 되물었다. "자기 이거 좋아하잖아! 진짜 같은데..."

아내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왜냐하면 도토리묵은 나의 고향에서만 진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아내가 도토리묵을 사가지고 오면 가짜인데 뭘 이런걸 또 사가지고 왔느냐며 나무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고향은 전북 전주 천변로에 자리 잡은 곳이다. 양 옆에 아카시아 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좁은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도토리골의 작은 마을이 자리를 하고 있다.

어릴 때 집에 오르내리면서 길목에 늘어서 있는 잎이 채 피지도 않은 아카시아 나무 줄기를 꺾어 입에 머금고 가다보면 집에 다다르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도토리라고 여겼던 것은 도토리가 아닌 상수리였다.
도토리는 떡갈나무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고 상수리는 너도 밤나무과의 일종으로 도토리보다 조금 큰 것인데도 그 때 우리는 모두 도토리로 불렀다. 

가을이면 아버지께서 큰 통나무 망치를 만들어 도토리를 따러 가자 하셨다.
나와 누나, 형님은 큰 대바구니를 챙겨 들고 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 주위에도 상수리나무가 많이 있는데, 멀리 발길을 재촉하셨던 것은 아마도 우리 집 주위에 있는 것은 우리 것으로 생각하신 듯 하다. 나는 따라가다 다리가 아파오면 아버지를 불러대며 어디까지 가느냐며 짜증 내었다. 그럴 적마다 아버지께선 다 왔다고 하시면서계속 산으로 올라 가시기만 하셨다.

숨이 차 혼자 뒤떨어져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후두둑~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연이어 상수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아버지께서 상수리나무를 통나무 망치로 두들기기 작한 것이다. "두둑 투 두둑..."  상수리가 둥지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요란스럽게 들리면 형은 빨리 오라고 나를 불러대었다. 형은 오래 전부터 아버지와 상수리를 따 봐서 그 맛을 아는지 콧노래까지 불렀다. 이미 먹을 것을 생각 한 걸까?

"용섭아! 그 쪽으로 많이 떨어졌어. 그래! 그 쪽 말이야~"
그 곳에서 상수리를 어느 정도 다 털고 나면 아버지께선 상수리 따는 코스가 정해져 있었는지 또 다른 곳으로 가자며 발길을 재촉하셨다.
오늘은 약주라도 한잔하신 날 처럼 어깨춤을 춰 보이시기도 하셨다. 누난 누나대로 형은 형대로 모두 흥이 나있었다.

내가 보기엔 우리 가족이 제일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께서는 직업 군인이셨는데 사고로 인하여 부하직원과 운명을 달리하고서는 그 때부터 약주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하고 가끔 큰 소리가 오가는 편 이셨지만 이때만큼은 평소에 무섭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의새로운 모습을 보는것 같았다.

아버님의 노랫가락이 점차 흥을 더해가고 있을 때 저편에서 꽝꽝~ 소리가 들려 왔다.
반대편의 산에서도 누군가가 나무를 두들기는 것이다. 누나가 용섭이는 조금 밖에 줍지않았으니 묵을 조금만 먹으라며 놀려대었다.누나는 내가 줍지는 않고 서서 구경만 하는모습을 보면서 약이 오른 것 같았다.

우리는 상수리가 바구니에 가득 채워지자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머니 앞에 대바구니를 내밀자 정말 많이 따 왔다고 좋아하시며 이내 멍석을 준비하셨다. 묵을 쑤려면 깍지를 까서 더 말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며칠동안 말린 상수리를 흘러가는 물에 씻었다.

우리집 옆에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바위틈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했었다. 그것을 보신 아버지께서는 바위를 정으로 다듬어 보기 좋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 물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아 이웃집에서 수도가 고장이 나거나 물이 나오지 않는 날이면 우리집으로 양동이를 들고 오곤 하였다. 새벽녘에 운동 다니시는 분들도 약수라 하면서 한 사발씩 들이 키고 가셨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그 곳에 바가지를 갖다 놓으셨다.

아마 우리집 식구들이 지금까지 크게 아프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물 덕이 아닐까? 깨끗이 씻은 상수리를 절구통에다 부어 놓고 형하고 나는 상수리가 튀어 나가지않게 조심조심 절구로 찧었다. 형은 하얀 비닐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서 여러 해 동안 갈고 닦은 솜씨를 마음껏 발휘하여 으깨었다. 덩달아 흉내를 내보고 싶어도 절구 둘레만한 구멍사이로 정교하게 두들기는 형의 능숙한 솜씨를 따라 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있었다. 그것은 커다란 학독에 더욱 몽글게 하시는 어머니께, 형이 친 상수리를 가져다 드리는 일이었다. 어머닌 물을 붓고 갈고 갈아서 그것이 채에 빠질 정도가 되면 커다란 가마솥으로 옮겨 가셨다.


가마솥에 장작을 지피는 일은 역시 아버지의 분담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후에야 묵은 찬물 속에서 먹음직하게 커다란 덩이로 변해 있었다. 진한 갈색을 띤 것이 맛깔스럽게 느껴져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지금도 그맛을 느껴보고 싶지만 단지 그 때 씁쓸한 토종의 맛은 혀끝에서만 맴돌 뿐이다.묵은 며칠을 두고 간식으로, 때론 반찬으로 가족끼리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먹곤

하였다. 내년에는 내가 두들겨 보겠다고 아버지께 약속을 하였던, 그 이듬해 아버지께서는 내가 망치를 휘두르는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물론 그 뒤로는 형이 아버지 대신 망치 자루를 잡았지만 그 해의 묵은 왜 그리도 씁쓸하던지...

그 후에 난 대학을 졸업 할 때까지 전주에서 역할이 조금은 변하였어도 묵을 지속적으로맛보다가 직장으로 인해 광주로 왔다. 이제는 어머니께서도 돌아가셔서 그렇한 맛은 이제 느낄 수 없는 과거속에 한페이지로만 기억될 생각에 더욱 마음이 공허감에 빠져 있었다.

자기야~ 하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치켜드니 아내였다. "묵을 사, 사지마?
무슨 생각을 그리골똘히 해?" 하고 핀잔을 주었다. 묵을 보다 잠시 옛 생각에 젖어 있었던 것이었다."색깔을 보니 진짜가 아닌 듯 싶은데..." 하니아주머니가 펄쩍 뛰시며 이것이 진짜가 아니면 어떤 것이 진짜냐며 역정를 내셨다.

"오늘은 진짜고 가짜고 묵좀 사 가지고 가자" 하니 아주머닌 다른데 가서 사라는 거였다. 팔고 있는 아주머니 앞에서 그랬으니, 난 변명이라도 하듯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반 억지를 써서 묵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저녁 식탁에 올라온 묵은 색깔부터가 예전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무 생각없이 어린시절의 그 맛을 느껴 보려 했지만 느낄 수가 없었다. 아내는 맛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오늘은 진짜를 사왔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장에서 아주머니를 설득하여 사 오느라 애를 먹었고, 또 아주머니가 가짜 이야기에 뛰시던 모습이 떠올라 다시 한번 한덩이를 입에다 넣고 지그시 눈을 감아 옛 맛을 떠올려 보았지만 역시 그것이 아니었다.

잠자리에 들었는데도"쿵~쿵"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콧노래 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고, 상수리 떨어지는 소리가 투둑거리는 것이였다. 어둠 속에 거실로 나오니, 하얀 상수리나무가 보여 발로 힘껏 차 보았다.


쿵~! 소리와 함께 병따개, 신문지, 장난감 상수리 등이 냉장고 위에서  장난감 상수리 등이 냉장고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 근로문화예술제 수필부문 노동부장관상 수상 -